기억이 아닌 추억에 뿌리를 내리는 insist "존재의 반대가 비존재가 아니라 존속이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존속하며,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실제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37~38쪽 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경우(존재) 그 사랑은 흘러가버린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경우(비존재)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존속한다. 사랑한다고 말한 사랑은 흘러가버리지만, 말하지 못한 사랑은 멈춰서서 결국 추억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우리는 진정으로 어떤 사건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내어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실제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37쪽 는 말은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서투름과 떨림이야말로 사랑하는 방식 그때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해도, 그래서 거짓이고 단지 꿈일 뿐이라도, 괜찮아요. 슬펐던 것은 당신의 편지가 아니었어요. 단지 어렸고 슬펐을 뿐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무엇인지 몰랐던 탓이지요. 다가가려고 했는데, 다가갈 방법을 몰랐던 것이 슬펐습니다. 저는 당신을, 당신은 저를, 어쩌지 못하여 안절부절하였지만, 그런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지요. 우리는 서툴렀지만, 그 서투름과 떨림이야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아직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저는 모르고 있군요. 그때 우리는 행복했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겠죠. 그때 행복했는지 지금은 아득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했다고 기억날 뿐, 잘 ..
그는 가을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거나, 종이 위에 뭔가를 쓰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퇴근을 한 후에는 시내로 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내는 도시의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저녁을 사먹거나, 집으로 돌아가 거실 창에 하얗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며 늦은 저녁을 먹는다. ------ Fall Practice, Sonata D minor No 13 : 2, adagio
ATOPIA와 아무 것도 없는 촌 구석 아토피아(Atopia)는 국경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장소(τόπος)가 아니다(οὐ)라는 의미도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사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촌 구석, 번거로운 일이 없는 자연의 낙토를 말한다. 장자의 응제왕편에는 여섯가지 끝(六極 : 상하와 사방 즉 공간이나 우주)을 벗어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겠다†以出六極之外 而遊無何有之鄕 는 말이 나온다. 이는 공간 좌표 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노닥거릴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이라면, 아토피아는 무하유지향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낱말들이 만들어진 때는 이천년이 넘었지만, 1984년 명명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개념에 근접해 있다. 데이터와 시계열의 디지털 신호가 구축해내는 광대한 우..
안개는 바람이 되어 사라지다 포구의 방파제 안에는 안개가 꽉차 있다. 바다 쪽에서 낀 해무는 아니다. 안개는 내륙의 산골짜기에서 피어나 새벽 햇살를 타고 산능성이를 내려와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들을 채우고 포구의 방파제 안에 고였다. 방파제를 넘은 안개는 바다 위에서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포구의 풍경은 그림자와 빛살이 안개 속에서 섞이고, 황토빛 위로 잿빛이 그물처럼 겹치고 스민다. 안개는 포구의 안쪽 바다에 비친 햇빛에 뒤섞이며 금빛으로 변했다. 빛은 수협건물과 선창가를 따라 일이층 높이로 나란한 건어물상과 음식점들의 유리창들을 낮은 목소리로 두드려댄다. 빛을 받은 유리들이 낮은 조도로 번쩍거리는 탓에 선창가는 술렁였다. 포구 너머로 차령산맥의 검은 끝자락이 내려앉고, 포구 안으로는 어선들의 고물과 ..
망한 X와 재수없는 Y가 만나다 아저씨 후계동에 가면 망한 자들을 만날 수 있다. 망한 자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거나, ‘정희네’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망했다면, 당신도 망한 것이다.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당신 또한 불초한 사람, 아저씨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울할 필요는 없다. 후계동에선 망했다고 실패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개나 소나 다 하는 과장, 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다. 짤리고 나서 허드렛일로 민생고를 해결하다 보니, 아저씨가 된 것이다. 실패라기 보다 사는 것이 좀 허접해진 것 뿐이다.'아저씨'란 'uncle'이 아니다. 사전 한 쪽 귀퉁이에는 "성인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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