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름과 떨림이야말로 사랑하는 방식 그때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해도, 그래서 거짓이고 단지 꿈일 뿐이라도, 괜찮아요. 슬펐던 것은 당신의 편지가 아니었어요. 단지 어렸고 슬펐을 뿐입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무엇인지 몰랐던 탓이지요. 다가가려고 했는데, 다가갈 방법을 몰랐던 것이 슬펐습니다. 저는 당신을, 당신은 저를, 어쩌지 못하여 안절부절하였지만, 그런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지요. 우리는 서툴렀지만, 그 서투름과 떨림이야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아직도 사랑이라는 게 뭔지 저는 모르고 있군요. 그때 우리는 행복했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겠죠. 그때 행복했는지 지금은 아득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했다고 기억날 뿐, 잘 ..
그는 가을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거나, 종이 위에 뭔가를 쓰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퇴근을 한 후에는 시내로 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사내는 도시의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저녁을 사먹거나, 집으로 돌아가 거실 창에 하얗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보며 늦은 저녁을 먹는다. ------ Fall Practice, Sonata D minor No 13 : 2, adagio
ATOPIA와 아무 것도 없는 촌 구석 아토피아(Atopia)는 국경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장소(τόπος)가 아니다(οὐ)라는 의미도 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사전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촌 구석, 번거로운 일이 없는 자연의 낙토를 말한다. 장자의 응제왕편에는 여섯가지 끝(六極 : 상하와 사방 즉 공간이나 우주)을 벗어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겠다†以出六極之外 而遊無何有之鄕 는 말이 나온다. 이는 공간 좌표 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노닥거릴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이라면, 아토피아는 무하유지향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낱말들이 만들어진 때는 이천년이 넘었지만, 1984년 명명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개념에 근접해 있다. 데이터와 시계열의 디지털 신호가 구축해내는 광대한 우..
안개는 바람이 되어 사라지다 포구의 방파제 안에는 안개가 꽉차 있다. 바다 쪽에서 낀 해무는 아니다. 안개는 내륙의 산골짜기에서 피어나 새벽 햇살를 타고 산능성이를 내려와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들을 채우고 포구의 방파제 안에 고였다. 방파제를 넘은 안개는 바다 위에서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포구의 풍경은 그림자와 빛살이 안개 속에서 섞이고, 황토빛 위로 잿빛이 그물처럼 겹치고 스민다. 안개는 포구의 안쪽 바다에 비친 햇빛에 뒤섞이며 금빛으로 변했다. 빛은 수협건물과 선창가를 따라 일이층 높이로 나란한 건어물상과 음식점들의 유리창들을 낮은 목소리로 두드려댄다. 빛을 받은 유리들이 낮은 조도로 번쩍거리는 탓에 선창가는 술렁였다. 포구 너머로 차령산맥의 검은 끝자락이 내려앉고, 포구 안으로는 어선들의 고물과 ..
이유없는 생애를 짊어지고 가는 자들 도시는 북쪽 언덕 위에서 남쪽으로 허물어진다. 오후의 햇살은 도시보다 낮게 포복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도시의 뒤를 감싸고 있는 산맥의 메마른 암벽에 빛이 부딪혀 도시는 황금빛으로 발광을 하고 골목 깊숙히 석양은 들어차기 시작한다.인터카라스의 거실 한쪽 그림자 밑에는 이역의 땅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거실에 배인 양고기의 누린내를 몰아내기 위한 탓도 있으나 무료한 탓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어디에서 왔느냐 무엇을 하느냐 말을 건네는 법이 없다. 하루의 피로가 그들을 멍한 침묵의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저녁이 여물면 골목의 전선 사이로 까마귀들이 날아올라 담과 건..
그 안이 텅비어 바깥마저 사라져버린 것들... 언제였던가...... 저런 곳에 쪽방을 얻어 살던 생애의 언저리가 있었어. 오후가 익어가면 철길을 따라 열차가 지나갔어. 어느 작가는 여기를 '국도의 끝'이라고 했지. 그렇지만 끝은 무토막 자른듯하지 못해서 끝을 찾지 못했어. 아니 그보다는 찾지 않고 그 끝에 잠시 머물기로 한 것 같아. 노을빛이 철길을 건너 온 그 날, 끓는 다싯물에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잘라 넣으며, 사는 게 재미없지만, 간혹, 이유없이, 아름답다는 것 때문에, 이 놈의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 용서해주기로 했지. 골목의 집들은 하나씩 비었어. 불빛들이 사라지고 창의 유리창이 깨지더니 벽에 이끼가 끼고 균열이 생겼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들이 마침내 사람이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착찹한 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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