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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gatorium

한 여자에 대한 사랑

旅인 2018. 6. 13. 07:03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추억하거나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아니면 실명이 심해지면서 거의 글을 쓸 수 없었던 보르헤스처럼 입 속으로 자신의 환상을 계속 되새기며 짧은 소설을 연금해 내던가 말입니다.

해가 떠오를 즈음, 까마귀가 날아다녔지요. 플라터너스의 우듬지에 제비가 날아다니더니 전선 위에 새 한마리가 앉았습니다. 아주 못생기고 삐쩍 말랐지만, 새벽의 새소리는 한 모금의 샘물처럼 시원했습니다. 아스팔트 위로 노란 아침 햇살이 드리워지고, 그림자가 서쪽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환청처럼 여름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내립니다.

새벽을 맞이하며 인생이나 비극과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되는 이 주책은 무엇인지? 그것보다는 저의 무의미한 나날들 속으로 흘러드는 풍경에 대하여 환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삶의 정점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겠지요? 종일 홀로 외딴 거리를 떠돌아 다니다보면, 마침내 외로움과 피로를 구분할 수 없는 오후가 됩니다. 그래서 타논 프라아티트 선착장 옆의 호텔로 돌아갑니다. 베란다의 난간에 턱을 걸치고 짜오프라야 강 건너편, 삔까오 평야 위로 저녁이 오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식어가는 열대의 오후 속에서 문득 어느 초라한 인생의 거친의 정점을 맞이하는데, 그 정점이란 텅비어서 광대하고 차라리 슬플 수 밖에 없습니다.

生의 온갖 열기들이 삔까오 평야의 풍경과 어둠 속에 뒤섞여 그 정점 속으로 말려들어갔죠. 함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 사랑이나 우정같은 것들이 빨려들어가며 제 생애가 하얗게 표백되는 느낌이었지요. 함께 외로움조차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무의미에 당도하지만, 그 무의미함을 벅차게 끌어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나하면 그것이 제 삶이며, 누구도 저의 삶이 의미가 있다거나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개같은 소리를 씨부릴 자격은 없기 때문이지요. 신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저는 저에게 할애된 이 지랄같은 나날들을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의미가 있었다면, 다른 자들이 퍼붓는 모멸과 자신이 깃들고 있는 오욕을 감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의미하기에 세상의 풍경을 육신의 내륙, 가슴뼈의 안쪽에 아로새기며 이 거친 세상을 버텨나갈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글거리던 낮의 열기가 잠잠해지고, 세나도 광장의 비둘기가 푸드득 날자, 하늘이 푸르다 못해 새까매지며 외딴 거리에 네온싸인이 켜집니다. 네온싸인의 불빛이 광장 위의 포석을 물들이자, 그토록 그리워하였던 외로움이라는 것을 마침내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번도 외로움을 느껴보지 못한 한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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