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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gatorium

나의 아저씨

旅인 2018. 5. 29. 17:10

망한 X와 재수없는 Y가 만나다


아저씨

후계동에 가면 망한 자들을 만날 수 있다. 망한 자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거나, ‘정희네’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망했다면, 당신도 망한 것이다. ‘아저씨’라고 부른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당신 또한 불초한 사람, 아저씨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울할 필요는 없다. 후계동에선 망했다고 실패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개나 소나 다 하는 과장, 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사람이다. 짤리고 나서 허드렛일로 민생고를 해결하다 보니, 아저씨가 된 것이다. 실패라기 보다 사는 것이 좀 허접해진 것 뿐이다.

'아저씨'란 'uncle'이 아니다. 사전 한 쪽 귀퉁이에는 "성인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즉 쓸데없이 나이나 쳐드신 乙들이 아저씨다. 甲이라면 '아저씨' 대신 ‘사장님’ 또는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원빈이 나오는 '아저씨’의 포스터에는 'the man from nowhere’라고 영어로 유식하게 써놓았다. 정관사(the)는 아저씨(man)을 예사롭지 않게 만든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놈’이 아저씨라는 거다. '나의 아저씨’에서는 'a man in anywhere' 즉, '너무 흔해서, 짜증나는 놈’ 쯤 된다.

그런 아저씨도 특별하게도 나의, 나만의 아저씨가 될 수 있다.


망한 X

박동훈(이선균 分)은 후계동 사람 중 드믄 망하지 않은 사람이다. 소시적에 공부를 잘하더니, 지금은 대기업의 부장이다. 게다가 사시에 합격, 변호사까지 하는 미모의 마누라가 있다. 아들은 아직 초딩인데도 미국에 유학까지 보냈다.

하지만 사는 일이란 수치스런 일이다. 일상에선 수채구멍 썩는 냄새가 나고, 때론 아랫도리를 입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그래서 뻔뻔해야 한다. 대부분은 어제의 부끄러움을 오늘의 부끄러움으로 지워가며 뻔뻔스럽게 살아간다. 겸덕은 동훈에게 말한다, "네 형과 동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뻔뻔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만, 너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 시린 아랫도리를 가리지 못한 채, 부끄러운 체취를 껴안고 끝끝내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동훈이 그런 부류다.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 평범한 나날들에 대한 갈증은 아내의 불륜과 함께 개쪽 나 버렸고, 여태까지는 산다는 게 좀 피곤하고 부끄러울 뿐 이었는데, 이제 자신과 세상과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틀어져 버렸을 뿐 아니라, 세상이 자신에게 가하는 모멸을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맨날 술을 마셔도 더러운 체취에 숨이 찼다. 다른 사람들은 '살다보니 망했다’고 할 수 있지만, 동훈은 이미 '선천적으로 망해 있었다.'

이 드라마는 망한 자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이 축구를 한다. 그러면 산 것 같다. 그 다음 '정희네'에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구원이란 자신과 아무개가 어떻게 망했는가를 안주삼는 것이고, 서로의 누추를 함께 씹어 소화하는 것이 친구며, 동네라는 것이 이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불륜은 친구와 안주 삼아 잘근잘근 씹기에는 너무 질기다.

도준영 그 새끼는 대학 서클 후배다. 선배님, 선배님, 친한 척 할 때부터 기분 나빴다. 진짜 싫은 놈은 이유없이 싫은데 놈이 그렇다. 그런 놈이 회사를 따라 들어오더니, 관두고, 재벌가 딸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어랍쇼! 짜식이 사장이 되어서 짠~ 나타났다. 사장이 된 놈도 그런 동훈의 마음을 알았는지 엿먹어라, 회사의 주축인 설계팀에서 구조진단3팀으로 발령낸다. 그러던 놈이 갑자기 동훈에게 다정한 척한다. 그때 동훈은 도준영이 자신한테 뭔가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바로 그때 그 새끼와 대학동기였던 아내 윤희가 눈이 맞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직감에도 불구하고 동훈은 아내와의 불륜을 알지 못했다.

동훈이 연루된 상품권 뇌물사건이 유야무야되고 난 후,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신 박동운 상무가 중국과의 약속을 펑크낸 탓에 대형 계약이 불발되고 지방으로 좌천된다. 사장 도준영이 이를 꾸몄으리라고 믿는 박동운 상무는 도준영의 통화목록을 동훈에게 주며 살펴보라고 한다.

그 목록을 추적하던 중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번호를 찾게 된다. 그 번호가 공중전화의 번호라는 것을 알게 되고, 부스를 찾아가보니 공중전화는 아내의 법률사무소 건너편에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차로에 빨간신호등이 켜지고, 신호등 옆으로 OOO호텔이 보였다. 아내의 차 글로브 박스 안에 있던 주차권, 거기에 적혀있던 호텔이다. 그리고 다정한 척하던 도준영에게 느꼈던 '저 새끼 뭔지 모르지만 나한테 잘못했다는 직감'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둘이 함께 침대에서 뒹굴었을 뿐 아니라, 도준영과 새 삶을 꾸리기 위하여 아내가 이혼을 꿈꾸었다는 것과 도준영이 뇌물 혐의를 뒤집어 씌워 자신을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한 전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훈은 아내의 불륜을 모르는 척 한다. 부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자식과 부모, 형제, 친구, 그리고 회사 동료들을 생각할 때, 안다고 까발려야 할 지, 어떻게 해야할 지 정말 모르겠다. 마땅한 대안이 나타날 때까지, 갈 데까지 가보는 수 밖에 없었다.


허위의 변증법

할 수 없이 동훈은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허위로 덮지만, 진실은 가리고 감춰도 계속 소환된다.

(사건)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다 >> (진실) 남편이 그 사실을 안다 >> (허위) 남편은 모르는 척 한다 >> (진실) 아내는 남편이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을 안다 >> (허위) 남편은 아내가 남편이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조차 모른 척 한다 >> (진실) 아내는 남편이 아내가 남편이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조차 모른 척 한다는 것을 안다 >> (사건) 결국 아내가 미안하다고 한다

윤희나 동훈이나 불륜을 모르는 척하고 있고,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조차 모르는 척하는 것을 안다. 윤희가 미안하다고 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달라질 것이라고는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 없다는 것 뿐이다.

도준영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내가 모르게 하라고 한다. 하지만 아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자, 사장실을 박차고 들어가 도준영의 아구창을 날린다.

불륜을 알았을 때 동훈은 그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다. 불륜을 저지르면서 자신에서 잔소리를 늘어놓고 거짓말을 하는 뻔뻔한 아내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불륜을 남편이 안다는 것을 아내는 안다. 아내는 더 이상 뻔뻔할 수 없다. 이제 아내는 집 안의 그늘과 남편의 등 뒤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도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 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아내의 눈길마저 모르는 척 해야 하는 것은 고문이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윤희가 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아내 또한 모르는 척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가련한 진실을 아는 윤희는 "미안해"라며 동훈의 발 밑에 무너지고 만다.

동훈은 문짝을 주먹으로 치며 "왜, 왜, 왜, 하필이면 그 놈이냐"고 소리친다. 도준영이 아닌 다른 놈이라면, 용서가 되었을까. 문짝을 치며 소리친 것은, 불륜 때문이 아니다. 이미 처참하게 균열된 건물이 붕괴되지 않도록 마지막 힘으로 떠받치고 있던 허위를 아내는 냉정하게 걷어차 버렸다. 건축구조기술사인 그로써도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게 됐다는 분노가 아니었을까. 아내를 패고 걷어찬다고 해소될 울분은 아니다. 세상은 이미 무너졌고 피폐하였으나, 자신은 그것을 몰라라 외면해왔던 것이다. 아내의 불륜은 붕괴의 원인이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허무하고 외로웠기에 윤희는 자신에게 깃들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내의 불륜은 자신의 세계가 직면하게 될 결과였다. 아내가 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먹이 뭉그러지도록, 그리고 아픔이 자신의 심장을 범람하여 자신의 허무를 채우도록 문짝을 패고 또 팬 것인지 모른다.

윤희는 무엇이 미안했을까.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 아님, 남편이 모른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남편이 몰랐다면 그렇게 미안했을까. 자신의 불륜보다,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모르는 척하는 남편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는 자신이 가증스럽다. 헤어지지 않는다면, 남편에 대한 수치와 거지같은 새끼와 살을 섞었다는 자책 때문에 지옥과 같은 나날을 앞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모르는 척 버티고 있는 남편에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 다 알아. 그러니 그만 끝내, 제발!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줘"라고 애걸할 수 밖에 없는 이기적인 자신이 미안했던 것은 아닐까.

미안하다면서도,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윤희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못한 것은 남편이다. 자신은 남편 만을 생각했으나, 동훈은 아내인 자신보다 가족들, 그리고 후계동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족들은 물론, 정희 언니에게도 잘했다. 하지만 동훈에게 자신의 존재란 항상 그들의 다음이었다. 그래서 사무치도록 외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만을 생각해 줄 것 같은 남자, 도준영이라는 그 야비한 새끼를 좋아하게 됐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이것이 불륜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 이유다. 용서란 간통에 상응한 단어일 뿐이다.


재수없는 Y

망한 X 곁에는 재수없는 Y가 있게 마련이다. 망한 자식들을 건사해야 하는 엄마도 그렇고, 큰 형수도, 작은 형수도, 신파 놀음을 하는 정희도 재수에 옴 붙은 것 같다. 술 먹고 오버이트 하는 것이 특기인 유라는 후계동의 망한 X들을 보는 것이 좋단다. 망한 X들이 멀쩡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같이 재수없는 Y도 뻔뻔하게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나보다.

재수없는 Y는 대충 두가지로 부류다. 팔자가 드러운 Y이거나, 남의 일에 초를 치거나 기분을 잡치게 하는 Y이다. 하지만 제 삼의 Y도 있다. 그것은 환장하게도 두가지를 고루 갖춘 Y이다.

이지안(이지은 분)이라는 아이는, 때에 절은 운동화를 신고 회사에 나타난다. 허름한 옷, 비린내 나게 마른 몸이다. 눈동자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큰 눈으로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 아이가 회사에 다니면서 뭔지 모르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하고, 더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계약직인 주제에 말을 붙여도 들은 척도 않는다. 싹 무시 당하는 기분? 아무튼 재수 없다.

여직원이 "계약직인 주제에"라며 건방진 아이의 태도를 따지고 든다. 아이는 여직원에게 남편 몰래 직장동료와 밀회를 즐기고 있는 것을 안다. 까불지 말고 너나 잘하라고 한다. 그 후로 여직원은 아이를 보면 왕재수라며 알레르기다.

아이가 그렇게 왕재수가 된 것은, 아이의 팔자 탓이다. 엄마가 남겨놓은 빚 때문에 사채업자의 등살에 갖은 고생 고생을 하다가 사채업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아직도 낮에 일한 몫은 사채 빚을 갚고, 밤에 주방 알바를 하여 번 돈으로는 말 못하는 할머니와 간신히 끼니를 해결한다. 그녀에게 허락된 사치란, 몸을 질질 끌고 돌아와,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 후, 회사에서 꼬불쳐 온 카페봉지를 3~4개를 까서 휘휘저어 원샷에 마시는 것이 전부다.

그런 녀자, 지안에게 왠 일? 부장인 동훈에게 오천만원 상당의 뇌물(상품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훔쳐 자신의 사채 빚을 털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사채업자 광일은 빚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놈은 어렸을 적부터 지안을 좋아했다. 광일의 아버지는 악덕 사채업자였다. 아버지는 유산으로 빚을 떠안게 된 어린 지안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광일은 아버지한테 맞는 지안이 애처로왔다. 말 못하는 할머니와 함께 괴롭힘을 당하던 지안이 아버지를 죽인다. 그 후 지안은 좋아하지만, 좋아해서는 안되는 지랄같은 Y가 된다. 광일은 지랄같은 지안을 괴롭힌다. 그런데 지안이 돈을 갚으면 더 이상 괴롭힐 수 없다. 그래서 훔친 장물이라며 "경찰에 신고하겠다. 그래서 찐하게 콩밥을 먹게 해 주겠다"고 한다. 재수없는 Y는 빚조차 갚을 수 없는 법이다. 할 수 없이 지안은 상품권을 다시 빼앗아 회사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는 춘대 아저씨에게 버리라고 준다.


y=f(x) : 그들의 함수관계

어느 날 동훈에게 오천만원 상당의 상품권이 배달된다. 뇌물수수 혐의로 박동운 상무를 쫓아내려고 도준영 일당이 보낸 것이나, 이름이 비슷한 탓에 벌어진 배달사고다.

도준영은 배달사고가 난 김에, 자신과 밀회를 즐기고 있던 윤희의 남편이자, 학교 선배랍시고 껄끄럽던 동훈을 없애버릴 생각을 한다. 제 삼의 인물을 통해 동훈이 뇌물을 받았다고 감사팀에 밀고한다.

어제 상품권을 받고 어떻게 할까 하며 서랍 속에 넣어둔 후, 퇴근시간에 지안이 자리로 와 "밥을 사 달라"고 했다. 밥을 먹고 난 후 "회사로 가지 말고 바로 집에 가라"던 지안의 행동이 불안했다. 동훈은 출근하자 마자 상품권을 찾는다. 서랍 안에는 상품권이, 으악 없다! 바로 그때 감사팀이 급습, 그를 회의실에 구금한 후, 서랍을 뒤진다. 상품권은 역시 없다. 감사팀은 CCTV를 까 보고, 택배로 부터 봉투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누구에게 받았으며, 어디에 상품권이 있느냐고 동훈을 다그친다. 뇌물을 받은 것이 기정 사실이 되어 갈 즈음, 청소부가 "누가 버린 것 같다"며 상품권을 갖고 나타난다.

비리에 연루되었다던 박동훈은 오천만원을 쓰레기통에 버린 멋진 사람, 회장이 오늘 저녁이라도 함께 하자고 해도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다는 쿨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동훈은 그런 평가가 달갑지 않다. 상품권을 받았던 순간, 형과 동생이 가게라도 할 수 있도록 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짤리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일 뿐이다. 아무래도 자기를 위하여 지안이 상품권을 훔쳐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다. 고맙다. 그래서 동훈은 지안에게 저녁을 산다.

그래서 망한 X와 재수없는 Y는 함께 밥을 먹게 된다.


오해를 통해서 이해를 하고...

동훈은 고마워 밥을 사려고 한 것이지만, 사채를 청산하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 지안은 다른 계획을 세운다. 사장인 도준영에게 박동훈 부장과 박동운 상무를 제거해 줄테니 각각 천만원씩 달라고 한다.

지안은 동훈의 스마트폰에 도청 앱을 깔고, 동훈의 일상을 감청하기 시작한다.

앱을 통해 감청하게 된 동훈의 일상은 예상과 달랐다. 그는 잘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세상과 어긋나 있었고,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여 서성거리는 남자, 자신 앞에 당도한 하루 하루를 어쩌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눈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덕거리는 숨소리, 울음조차 잃은 초라한 어떤 아저씨가 가청 주파수 저 편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숨소리를 들으면, 버겁고 못난 일상을 간신히 견뎌내는 남자가 불쌍했다. 지안은 자신 만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폰에 귀를 기울이며 동훈의 일상에 매달린다.

세상과 어긋나 있는 남자의 일상은 논리적이지 않다. 약한 사람을 짓밟고, 관계에 개이득이 없으면 두번 다시 돌아보지 않고, 남의 뒤통수를 치고 자기만 잘 살면 되는 도준영처럼 그 남자는 살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폼나게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이라는 그 어리석고 못난 것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

착한 사람도 세 번 정도 도와준 후, 불행이 전염될까 모두 곁에서 떠났다고 하는 지안을, 동훈은 네 번이 넘도록 도와주고, 동료로, 이웃으로 받아주며, “나는 누구와 한번 관계를 맺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없다”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꼭 부르라고 한다.

자기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동훈에게 지안은 그렇게 말한다.

"좋은 사람이예요, 그것도 엄청!"

동훈은 지안에게 그냥 좋은 부장으로 남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안은 부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부른다.

도청 앱을 통해 어느 골목에서 목놓아 울고 싶어하던 한 남자를 알게 되고, 자신을 살인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 가족에게 그렇게 한다면, 나라도 그 애처럼 죽일 수 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어떻게 부장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동훈씨, 선생님, 기타 등등 차마 부를만한 이름이 없을 때, 아이는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너나 모두의 것이 아닌 나의, 나만의 아저씨.


그리고......

그 후 드라마는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그다지 잘 벌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나쁜 놈 도준영과 그 떨거지는 회사에서 개쪽이 나서 쫓겨나고, 아내는 이혼 대신 유학 간 아들 뒷바라지 핑계로 미국으로 간다. 회사에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자, 동훈은 상무직을 내던지고 따로 회사를 차린다.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은 여전히 공을 차고 '정희네'에서 술을 마신 후 뻔뻔스럽게 살아간다.

물론 그 사이, 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도 잘 치른다. 그리고 지안은 도감청 문제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게다가 지안의 사정을 알게 된 회장의 소개로 부산의 어느 회사에 취직한다.

부산으로 떠나는 지안에게 동훈은 “행복하자”며 주먹을 올려보인다.

행복하려고 한다고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불행하려고 해서 불행한 것일까?

덜거덕 시간이 흐른 후, 부산에서 서울로 일자리를 옮긴 지안은 점심먹고 엔젤인어스나 스타벅스, 탐앤탐스 등에서 아메리카노 등을 테이크 아웃하는 신세가 되었다. 옷도 메이커고 이제 운동화도 아닌 것을 보니 아무래도 카페봉지는 끊은 것 같다.

지안은 우연히 커피를 주문하다가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어폰을 통해 듣던 아저씨의 목소리, 지안은 서울에 있는 아저씨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숨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만난 동훈은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아저씨(a man in anywhere)처럼 어색하고 서먹하다. 그래서 그냥 헤어지기도 서먹하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면 자기가 맛있는 것을 사겠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야, 그들이 다시 만나 맛있는 것을 함께 먹게 될까?

드라마의 해피엔딩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문들이, 선뜻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고 이미 끝난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게 한다.


배암 뒷다리

여태까지 본 드라마 중 최고다.

사건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리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사건을 따라가며 한 인간의 통증을, 처참함을, 분노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탤런트들의 이름을 잊고 극중의 이름인 동훈, 지안, 상훈, 지훈, 겸덕, 윤희, 정희 등으로 인물들을 기억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드라마의 거친 숨결과 인물 하나 하나 마다 날줄처럼 매겨지는 감정들을 절절히 느꼈다. 보다 보면 인생처럼 지쳐버릴 수도 있는 그런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즐거움을 너머 행운이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수요일과 목요일이 주말보다 더 기다려졌다. 그리고, 그만 끝나버렸다.

나의 아저씨, 끝나버리다니......!

xxv-vmm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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