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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없는 생애를 짊어지고 가는 자들

도시는 북쪽 언덕 위에서 남쪽으로 허물어진다. 오후의 햇살은 도시보다 낮게 포복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도시의 뒤를 감싸고 있는 산맥의 메마른 암벽에 빛이 부딪혀 도시는 황금빛으로 발광을 하고 골목 깊숙히 석양은 들어차기 시작한다.

인터카라스의 거실 한쪽 그림자 밑에는 이역의 땅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거실에 배인 양고기의 누린내를 몰아내기 위한 탓도 있으나 무료한 탓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식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어디에서 왔느냐 무엇을 하느냐 말을 건네는 법이 없다. 하루의 피로가 그들을 멍한 침묵의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저녁이 여물면 골목의 전선 사이로 까마귀들이 날아올라 담과 건물 위에 서성인다. 까마귀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까마귀의 눈이 대가리 어디 쯤 있을까를 생각할 때 마른 밤은 시작하는 법이다.

세헤라자데는 이 시각이면 다음 날의 목숨을 부지할 그 날 하루의 이야기를 마련해야만 했다. 천일하고도 하루의 이야기란 얼마나 처절한 기록이었을까?

샤워를 한다. 3개월 쯤 물에 젖고 그늘에 말라 쉰내나고 딱딱해진 타월로 몸을 닦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몸을 눕힌다. 베개에선 나보다 먼저 자고 간 12명 쯤의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

냄새들에선 피로가 남기고 간 유목의 얼룩, 땀비린내와 함께 넋을 달래기 위한 주문(Requiem)이 떠오른다. 어쩐지 털없는 짐승의 머리털 밑으로 새어나온 육신의 흔적은 서글프다.

가면의 밤동안 한번도 본 적 없는 자들이 남긴 혼곤한 체취를 맡으며, 이 곳까지 흘러왔다 떠나간 자들의 인생을 헤아려 본다. 자신들은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홑겹의 목숨으로 위태롭고 뒤틀어진 생애를 돌파해나가는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구겨지고 찌든 흔적이 왈칵 쏟아지는 법이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나는 온 것일까?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나 다시 또 다른 남자의 냄새를 헤아린다. 지나간 식은 땀들이 베개 위에 적신 흔적 속에는 대화보다 짙은 영혼의 얼룩이 느껴진다. 영혼이란 서글픈 법이다. 이유없는 생애를 짊어지고 가는 자들, 육신이 흘리는 땀을 육신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막연하여 할 수 없이 구겨만든 것이 영혼일진데, 거기에는 자신으로 부터 소외(疏外)되어 죄와 고독으로 몰린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불면하는 영혼보다 나의 초라한 육신의 피곤함을 감당하기 위하여 "안식을..."이라고 빌며 내일 올 또 다른 나그네를 위하여 나의 식은 땀을 베개 위에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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