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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gatorium

섬과 안개

旅인 2018. 6. 16. 18:03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느껴야 할 것을 단지 생각만 하기 위하여,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쓰고자 했던 탓에...

강의 칠흑같은 나신으로부터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하얀 김은 또 다른 김과 섞이고 추운 대기 속에 풀어지면서 안개가 된다. 강 건너편 강변도로 위의 가로등에서 날라온 빛이 안개의 입자에 부딪혔고 다른 입자로 반사되며, 다시 섬의 외등빛과 함께 비벼진다.

그리고 강변의 숲과 가지를 빛으로 감쌌다.

안개에 갇혀 날아가지 못한 빛은, 안개 속에 산란하고 또 산란된 빛을 잉태하며 빛의 덩어리가 되었다. 빛의 덩어리는 안개로 풀리며 춤을 추듯 검은 강물을 따라 흘려갔고 섬 주변으로 풀려지고 스민다.

잎이 진 은행나무의 단조로운 가지와 미루나무, 은사시나무의 가지들이 섞여 빛을 거스르고 있다.

빛 속으로 들어가자, 유광체라도 된 것처럼 몸에서 분말같은 빛 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팔뚝에도 빛이 어리고 조만간 모든 세포가 빛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빛에 감싸여 희미해져 가던 나는, 뚜렷한 외로움을 마주했고, 그 끝에 있는 적막 속으로 들어가 젊은 시절에 보듬어야 할 마지막 낱말을 떠올렸던 같아.

짧디 짧은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 지금 여기에 있어."라고 강 저쪽을 향해 소리쳤어.

그 목소리는 믿을 수 없게 애절했고, 그 소리가 다시 내 가슴에서 울렸다.

있지도 않은 시간에, 존재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빛과 가랑비에 젖은 강물소리 속으로 스며들어가 뒤섞이는 풍경 속에 나의 생각을 흘려버리자, 다시는 구체(具體)의 육신에 깃들어 거칠고 자명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후, 수억년동안,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궤도를 지나가는 행성과 같은 외로움이 끼쳐왔다.

미안하게도 나는 사랑과 같은 것을 믿지 않았어.

잡을 수 없고 순간적이며, 자신의 사랑조차 가늠할 수 없으며, 좋아함과 사랑의 경계조차 그을 수 없는 것, 서로 살을 섞고 나서야 간신히 그 미끄덩한 실체를 확인하고 쾌락으로 접어들거나, 그만 갈망이 사라져 쓰레기통으로나 던져져버리는 그러한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것이 타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피고 지는 것임을 나는 알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 내 가슴은 영원하고 단일한, 통제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에 꽉 차서 빛과 안개로 가득한 섬의 끝으로 밀려온 것만 같아.

한번도 너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지 못했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너의 부재 속에서, 뚜렷한 너의 현전을 받아들이며, 온몸의 밑바닥은 뒤집어져 심장이 밖으로 나오고 살갗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증과 기쁨으로 정신이 얼얼하다.

사랑하거나 묵혀두었던 가슴의 진실들을 퍼올려 편지에 써서 부쳐야 할 이 가을에, 너를 방치해 둔 채, 하잘 것 없는 책 속에 코를 박고 지내왔다는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다. 아랫도리가 시리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며, 이 밤의 온갖 것들로 부터 너의 향기를 느끼고, 내 귀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너의 속삭임을 듣는다. 지금 나는 너와 보낸 온갖 시간들을, 순간 속에 응축시키고, 폭발시킴으로써, 영원의 끝에 있는 곳까지 다가갈 것 같다.

이 감정을 너에게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을이 서울의 서편 낮은 들 위를 채우던 어느 날, 친구의 창 밖에서 친구의 피아노 소리를 기다렸던 적이 있어. 한시간인가 서성거린 끝에 피아노 소리가 들렸지. 그 순간 친구와의 우정은 이미 가버렸지만, 그보다 더한 우정이 내 가슴에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더한 우정이 가슴을 채웠지만 더 이상 해맑은 웃음을 함께 나눌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앞으로 둘 사이의 우정이 더 이상 향기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순수를 잃어버림으로써 현명해지거나 타락하는 것이라는 느낌 탓에 먹먹했던 그때의 슬픔과 지금의 이 감정은 많이 닮아있다.

교정기를 반짝이며 웃음을 물고 있는 너의 입술과 알맞게 살이 오른 허벅지, 무관심이 담겨져 나로부터 약간 멀어져 있는 그 눈, 이 모든 것이 나뉘어 질 수 없는 너의 실체이며, 내 욕망의 뿌리라는 것은 미치게도 사실이다.

지난 여름과 가을, 의도적으로 방황을 했다.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않고 단지 생각만 하기 위하여, 뚜렷하고 전일한 탓에 전혀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고자 했던 탓에, 비로서 시작한 나의 젊은 나날들은 그만 속절없이 흘려가버렸고, 그만큼 나는 말라갔다.

때로 너는 장난처럼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내 가슴의 떨림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네 말을 믿지 않았어. 나의 터무니 없는 불신은 너를 끊임없이 외롭게 했던 것 같아. 시간이 흘러도 옹졸한 껍질에 갇혀 있던 나의 곁에서 외로움에 수줍게 떨며 장난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너를, 가슴에 품어주지 못했던 죄악을, 무지요, 이기심 탓이라는 말로 나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내가 지닌 절망을 이해하지 말고 그만 용서해주기 바래.

이제는 너의 갈증을 내 가슴 속 깊숙이 받아들여 서로가 무화되어 더 이상의 애달픔이 없는 상태까지 표류하고, 천년처럼 기나긴 입맞춤 속에 너의 속에 스며들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동안 욕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 욕정없는 사랑의 공허감, 부딪힐 육신없는 허무, 대상없는 사랑은 인간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 가련한 소망이라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촉촉이 젖은 너의 손과 풍성한 가슴을 취하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가식과 절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왜 몰랐을까?

xviii-iiimm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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