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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gatorium

모자란 날들의 일기초

旅인 2018. 6. 12. 23:08

가난한 나의 나날에도 불구하고

20170414

벗꽃이 진다. 그 모습은 꿈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나른하다. 꽃잎은 햇살을 흔들며 떨어지고, 봄날의 땅에 쌓였다.

점심 때에 궂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후 내내 내렸다.

20170428

몇일동안 날이 좋았다. 아침 햇살은 꼭 가을 같았다. 오후가 되면 바람이 불었고 추웠다.

20170513

폭염과 영하의 바람 그리고 봄을 지나 도로 건너편 한전 앞 화단에는 장미가 빨갛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20170515 --- 비 내리는 여자

여자를 처음보았을 때 놀랐다. 짙고 넓은 아이라인 때문에 경극 배우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파파이스 앞 지하철 통풍구 턱에 앉아 한숨같이 담배연기를 뱉아내고 있었다. 화장과 옷차림 때문에 30대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면 낡고 바래어 나보다 더 늙었다. 몇번 마주친 후에 그녀의 아이라인이 지워지지 않을, 문신이란 것을 알았다.

회사 근처에서 종종 마주쳤는데, 청바지에 니트를 걸친 그녀의 몸은 노가리처럼 말랐고 작았다. 한쪽 손에는 소주병이 매달려 있었고, 또 한 손에서 담배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녀는 남영동 일대 아무 곳에서나 출몰했다. 밥을 먹었는지 잠은 어디에서 자는지 알 수 없다. 새벽에는 어느 골목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나 햇빛 저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로 찌들어 있었다. 그 피로는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우울로 인수분해가 되는 형식이었다. 슬픔과 우울의 이유는 더 이상 인수분해가 불가했다. 단지 인생이란 저렇게 찌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값싼 진실 만 건져낼 수 있었다. 비칠거리며 그녀가 거리를 거닐 때, 외로움이 가져다 주는 침묵에 대해서 문득, 우리는 할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길 모퉁이에서 그녀를 마주친 동료는 그렇게 말했다.

"저 여자만 나타나면, 꼭 비가 내린단 말이야.

20170520

낮의 더위가 식는 저녁에 듣는 배미향의 저녁스케치. 배미향의 목소리는 저물어가는 저녁처럼 느리고 음악은 70, 80년대의 별밤처럼 아득하다.

그리고, 곧,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20170524

저녁이 온다. 하늘이 드넓게 맑았다. 해는 대지의 먼지 아래로 침몰하며 새상의 저 끝까지 낮은 빛을 뿌렸다.

빛은 회사의 서쪽에 건설되고 있는 어느 사옥의 철재빔과 크레인에 달린 후커를 사선으로 두드렸다. 아직 대낮인데도 철재빔에 반사된 석양빛이 마치 어선의 집어등처럼 건물 철제빔의 끝부분에서 반짝였다.

가난한 나의 나날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저렇게 온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0170527

가질 수 있는 것을 탐하기 보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누리고 안녕을 고해야 하는 계절이다. 흘러가 버리는 음악과 빛으로 일렁이던 풍경과 가슴 가득히 들아찼던 그 향기들...

i-vimmx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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